광주 광산 가볼만한곳 베스트10 | 여행 명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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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광산 가볼만한곳 베스트10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광주 광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흥미로운 문화가 공존하는 베스트 10 관광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순위는 한국관광공사의 인기 순위를 참고하여 선정되었으며, 다양한 즐길 거리와 볼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이 목록을 참고하시어, 특별하고 의미 있는 여행을 즐겨보세요. 행복한 추억을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신창동 선사유적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신창동 선사유적지 소개
신창동 유적은 초기 철기시대 말에서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거대한 유적지로써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에 형성된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생산과 생활 그리고 분묘의 실상을 알려주는 복합유적지입니다.
40,000㎡ 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주거지와 생산과 관계된 각종 유구가 분포되어 있으며 1992년 국립광주박물관이 발굴조사하면서 우리나라 최초 저습지 유적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유적의 중요성이 학계와 일반에 알려지면서 국가사적 제37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신창동 유적은 영산강의 지류인 극락강 서단의 삼각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은 4개의 저평한 구릉과 구릉 사이의 곡간대지 강변 충적대지에 형성되어 있으며 주거지, 환호, 토기요지, 저습지와 공방지등이 확인되어 당시의 마을의 생활영역, 생산영역, 의례영역, 방어영역이 모두 확인된 셈입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2만여점은 국립광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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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동 선사유적지 기본 정보
용아생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용아생가 소개
이 곳은 우리나라 현대 문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초창기 시단을 빛낸 시인 용아 박용철(1904∼1938) 선생의 생가입니다.
선생은 이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소개하고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습니다.
용아의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와 슬레이트 등으로 개량하였으나 1995년 문화재 복원 사업을 실시, 다시 초가지붕으로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 등이 남아 있습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높다란 막돌 기단 위에 세웠다.
왼쪽은 부엌이며, 중앙 2칸은 방인데, 4개로 나누어 열리는 문을 갖고 있습니다.
나머지 2칸은 2개로 열리는 정자 살문입니다.
사랑채도 5칸인데 오른쪽부터 부엌, 방, 마루의 차례로 되어 있습니다.
사당은 정면 3칸 , 측면 1칸의 맞배지붕입니다.
행랑채는 4칸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습니다.
이 집은 용아의 고조부가 지었습니다고 전해지나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인 박용철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안윽한 이 항구인 들 손 쉽게야 버릴 거냐…- - - - 가수 김수철이 불러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두야 간다]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용아 박용철의 시 「떠나가는 배」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식민지 땅에서 울분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찾아 떠나는 젊은이의 마지막 작별의 시는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도 찡한 감동을 안겨준다.
광주가 낳은 서정시인 용아 박용철은 영랑 김윤식과 함께 한국 시문학의 새 지평을 연 개척자다.
박용철 선생은 광주 공립 보통학교와 서울의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동경 청산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김영랑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다시 외국어학교 독문과에서 수학한 후 연희전문학교를 수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문학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김영랑, 정지용, 정인보, 변영로 등과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문예월간」을 창간하여 외국문학을 소개하였습니다.
1931년에는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여 창간호에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등을 발간하였고, 극예술연구회의 동인으로 신극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외 시의 이론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박용철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고, 광산구에서는 1992년부터 박용철 선생 추모 전국백일장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용아의 후배들이 다니는 송정중앙초등학교는 용아축제 한마당을 열고 있으며 교정에 진달래와 개나리, 산수유가 피는 [용아동산]을 만들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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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생가 기본 정보
삼거동 고인돌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삼거동 고인돌 소개
삼거동 고인돌은 평동∼삼도간 도로와 함평∼나산간 도로의 삼각 지점에 위치하는 구릉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이 곳에는 반경 200m 이내의 구릉상에 2개군 49기가 분포되어 있습니다.
고인돌의 형태는 덮개 돌과 덮개 돌을 받치는 굄돌, 무덤방으로 이루어지나 굄돌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굄돌의 유무와 높이에 따라 남방식과 북방식으로 구분되는데, 이 곳 고인돌은 모두 굄돌이 낮거나 없는 남방식입니다.
49기 중 굄돌이 없는 고인돌은 20여기이며 10여기는 무덤방이 노출되었습니다.
덮개돌의 형태는 장방형이 일부 있으나 대부분 원형이나 타원형입니다.
가군은 23기로, 군집 형태는 동서 2열이며, 굄돌은 판석형이나 자연석을 이용하였습니다.
덮개돌은 2기만 100m~130m로 비교적 두꺼운 편이며, 나머지는 얇고 밑부분이 땅에 밀착되어 있습니다.
덮개돌의 장축 방향은 동서 방향이 대부분입니다.
나군은 26기로 구릉 경사면에 남북 1열로 분포되어 있는데, 북두칠성의 배치와 비슷하다.
크기는 비교적 소형으로, 가군과 비교하여도 작은 편입니다.
덮개돌은 땅에 밀착되어 있으며 장축은 모두 군집방향과 같은 남북입니다.
그리고 마을 이름도 나군 고인돌에서 유래된 것 인듯하다.
삼거동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는 채석장이 없다.
그러므로 이곳의 고인돌을 만드는 데에 쓰인 석재는 외부에서 가져와 인위적으로 만들었습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인돌 주변에 최영남이 경작하는 밭에는 유약이 없는 경질의 토기 조각들과 강돌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로써 이곳이 선사인들의 취락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지정연도 : 1990년 11월 15일
시대 : 청동기시대
종류 : 고인돌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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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동 고인돌 기본 정보
월계동 장고분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월계동 장고분 소개
월계동장고분은 영산강 상류의 낮은 구릉지대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입니다.
이 무덤은 모양이 전통악기인 장고 또는 장구와 비슷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장고분이라고 불러왔고, 근처 마을도 장구촌이라고 했습니다.
이 무덤은 2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1992년 이 일대가 첨단과학산업단지로 조성되는 과정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1993년과 1995년에 전남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무덤의 규모와 구조가 밝혀졌다.
1호분은 봉분의 길이가 44m이며, 주검을 안치한 석실은 원형의 분구에 있고, 그 남서쪽에 석실을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있습니다.
발굴 당시에 석실의 천장은 무너져 내려앉은 상태였는데 1997년에 다른 고분을 참고하여 복원하였습니다.
분구는 깊이 1~2m 남짓한 방패모양의 도랑에 감싸여 있는데 이 도랑에서 많은 원통형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2호분은 분구의 길이가 33m 로 1호분과 비슷하다.
무덤의 구조와 형태, 출토유물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비슷한 점이 많아 고대 한일관계사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고 만든 시기는 5~6세기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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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동 장고분 기본 정보
무양서원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무양서원 소개
광주의 옛이름 "무진의 볕"이라는 뜻을 지닌 무양서원은 고려 인종때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운 사원입니다.
고려 인종 때 어의 최사전과 그의 후손 최부, 최희춘, 나덕현 다섯분의 신주를 모신 서원입니다.
강당인 이택당을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에 합의문과 합인문이 있습니다.
합의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동재인 성지재가 있고 왼편에는 서재인 낙호재가 있습니다.
내삼문인 삼오문을 지나 높은 땅 위에 담장이 있는 무양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사당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무양서원에 이르는 마을은 토담길로 단장되어있으며 입구의 광장과 주차장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주위의 오래된 거목들은 마치 유생들의 기상을 펼쳐놓은 듯 아름드리 펼쳐있어 무양서원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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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양서원 기본 정보
송산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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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유원지 소개
오랜 세월 동안 원시적인 상태로 남아 있던 광주 황룡강의 섬을 송산유원지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이 섬은 전체가 공원으로 섬의 면적은 3만 9,277㎡입니다.
강은 어등산이 감싸고 섬은 황룡강이 감싸안아 시원스럽고 아름답다.
1만 2천여평의 잔디광장, 그 광장을 둘러산 산책로, 산책로를 따라 조성된 60여개의 단지와 가로등, 씨름장, 아득히 보이는 섬의 북쪽 끝에 있는 6개의 돌탑들이 있습니다.
육지에서 섬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육지부터 섬까지 연결된 청등보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섬안에는 생태연못, 플라타너스 광장, 잔디광장이 있습니다.
송정리 영광통에서 영광방면으로 약 5km 남짓을 가다보면 황룡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입니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우회전을 하여 박호동 가는 길로 들어서서 2,000여 미터를 더 가면 커다란 강 한 가운데 있는 섬 공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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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유원지 기본 정보
두남제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두남제 소개
두남제는 행주기씨 문중 재각으로 건축적 배치 및 조형이 가지는 유교 건축의 규범과 품격이 잘 유지되어 있으며, 한옥의 멋을 느낄 수 있는 문화 경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건물은 화강석 기단 위에 정평주초를 넣고 평주와 고주를 세운 정면 5칸, 측면 2칸의 한식 기와 팔작지붕입니다.
마루는 귀틀에 의한 툇마루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중앙에 대청과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천정은 대들보 위에 마루 대공과 종보를 결구하여 종도리를 걸친 5량 집입니다.
창호는 좌우 1칸씩은 분합문으로 되어 있고, 중앙 3칸은 4분합문으로 되어 있으며, 띠살창입니다.
상인방 위에는 빗살창으로 된 봉창이 있습니다.
창호 좌우측에는 머름을 장식하였고, 좌우측 툇마루는 머름을 대고 1단 높인 마루입니다.
대문은 맞배지붕의 평 3문이며, 담장은 토석 혼축의 담장입니다.
처마는 겹처마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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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남제 기본 정보
칠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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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송정 소개
조선시대 후기 정자인 칠송정은 함재 기효증(1551~1616)의 작은 정자입니다.
아버지 고봉 기대승을 3년간 시묘살이 했던 곳으로 원래는 구들이 놓인 움막집 형태로 그의 만년에 지냈던 정자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50리 떨어진 너브실마을에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지금 정자는 원래에 위치에서 중건하면서 옮겨지었습니다.
광산구 임곡동 소재지에서 장성읍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편에 광곡(너브실)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입구에는 고봉 기대승의 도학사상을 잇기 위한 고봉학술원이 있는데, 그 옆에 칠송정이 있습니다.
이 마을 안쪽에는 고봉을 배향한 월봉서원이 백우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자 주변에 직접 일곱 주의 소나무를 뜰 앞에 심어 사계절 불변의 지조를 지닌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았습니다는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칠송정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일곱 그루의 소나무는 남아 있지 않다.
정자의 정면에 올려져 있는 [칠송정(七松亭)] 현판의 글씨는 한말의 거유 석촌 윤용구(1853∼1939)가 행서로 썼으며 이 당시에 중수 또는 보수를 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칠송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이며 방은 들이지 않은 누각형의 정자로 마루 위에는 현판 외에 두개의 편액을 볼수 있습니다.
후손으로 8세손 기봉국의 [호산승처필명정(湖山勝處必名亭)]의 편액이 있고 1905년(고종42)에 10대 손 기동준이 쓴 [칠송정중건기(七松亭重建記)]의 기문이 있습니다.
*고봉 기대승
고봉 기대승은 이황과 성리학을 문답하여 「사단칠정」에 관한 편지만도 8년을 계속해서 교환했으며, 뒤의 유학자들 중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성리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나중에는 이황도 그의 이론을 많은 부분 받아들이게 되었고, 후학이긴 하지만 거의 동등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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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송정 기본 정보
도림사(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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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사(광주) 소개
도림사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림마을 입구에 있으며 노사 기정진(1798~1879), 난와 오계수(1843~1915), 후석 오준선(1851~1931)을 모신 사우입니다.
기정진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병인소를 올려 외적을 방비하는 대책을 건의하였고, 위정척사사상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오계수는 기정진의 제자로 을미사변 후 일어난 을미의병에 참여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가마마을 뒤쪽 산에 있는 영사재에서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였습니다.
오준선도 기정진의 제자로, 한일병합 이후 용진산에 들어가 용진정사를 세우고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습니다.
1934년 나주오씨 문중과 오계수, 오준선의 후학들이 오계수, 오준선과 기정진을 기리기 위하여 도림사를 세웠다.
도림마을은 오계수와 오준선이 태어난 곳이며, 나주오씨 문중의 집성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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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사(광주) 기본 정보
오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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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남제 소개
오남재는 고봉 기대승의 부친인 덕성군 기진(1487~1555)을 제향하는 재실입니다.
기진은 행주 사람으로 자는 자순, 호는 물재입니다.
동생 기준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다 1519년 기준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21년에 사약을 받고 죽자 형 기원과 함께 광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기준의 둘째 아들 기대승이 광국공신 3등에 오르자 기진도 사후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겸판금의부사를 추증받고 덕성군에 봉해졌다.
오남재는 1560년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증축이나 중수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건물은 솟을삼문과 토담으로 된 담장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이며, 내부 우측에 『금송유사 공사원 유사임자 3월 29일』이란 현판 내용과 재각 정면에 『고봉선생과정기훈』이란 제하의 기문이 걸려 있습니다.
내부는 대청마루로 되어 있고, 대문은 솟을대문이고 대문 좌·우측에 각 1칸씩은 창고로 쓰이고 있습니다.
오남재는 조선 중기에 지어진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형태가 양호하여 조선시대의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는 점에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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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남제 기본 정보
지금까지 광주 광산 가볼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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