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북 가볼만한곳 베스트10 | 여행 명소 추천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광주 북 가볼만한곳 베스트10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광주 북의 숨겨진 보석 같은 명소들부터 잘 알려진 관광지까지, 다양한 매력을 선보이는 베스트 10 장소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국관광공사의 인기 순위를 참고하여 선정한 이 목록에는 경이로운 자연 경관, 풍부한 역사적 유산, 그리고 독특한 지역 문화가 어우러진 명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행 계획에 참고하시어, 색다른 경험과 즐거운 추억을 쌓으시길 바랍니다. 활기찬 모험이 가득한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중외공원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중외공원 소개
광주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중외공원은 수려한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도시 근린공원입니다.
공원의 드넓은 잔디밭과 다양한 꽃과 수목이 심어져 있어 봄꽃 놀이와 가을철 단풍 명소로 유명하다.
중외공원 근방에 광주비엔날레 전시장, 광주문화예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 및 전시시설이 밀집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중외공원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tour.gwangju.go.kr
운영 시간 00:00~24:00
주차시설 가능(200대/비엔날레 주차장 600대)
쉬는 날 연중무휴
광주호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광주호 소개
광주에서 동쪽으로 16km 지점에 있는 광주호는 담양호·나주호·장성호 등과 함께 영산강 유역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영산강의 지류 고서천을 댐으로 막아 1976년 9월 준공된 인공호수입니다.
4개 호수 중 가장 규모가 작지만, 댐의 길이는 505m, 높이 25m로 결코 작지 않은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의 용대산과 그 건너편을 막아 만든 것인데 1974년에 공사를 시작해 1976년에 완공했습니다.
광주호는 무등산 아래에 위치하여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룬 호반 휴양지로서, 어족이 풍부해 낚시터로도 각광을 받아 많은 휴양인파가 찾습니다.
광주호 상류 충효동 일대에는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 유적지인 식영정을 비롯해 환벽당, 소쇄원, 취가정, 독수정 등의 정자가 자리잡고 있어 조선시대 정원문화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광주호 남쪽으로는 2006년 개장한 호수생태원이 있어 시민들의 자연생태학습과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광주호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tour.gwangju.go.kr
운영 시간 상시 가능
주차시설 있음(광주호 호수생태원 이용, 180대 주차가능)
쉬는 날 연중무휴
원효사(광주)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원효사(광주) 소개
원효사는 광주 무등산 원효계곡의 웅장한 산세 속에 있으며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각을 가지고 있는 전통사찰입니다.
신라 때 원효대사가 산의 수려함을 사랑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지냈다 하여 원효암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고려 충숙왕 당시의 이름 있는 화엄종 스님이 창건한 뒤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원효암이라 했습니다고도 합니다.
그 후의 역사는 입증할 길이 없으나 문정왕후의 섭정 때 사세가 다시 일어났으며, 선조 때의 승병장이었던 영규가 수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때 전소된 뒤 증심사를 중창했던 석경이 직접 기와를 구워 중창하였습니다.
원효봉 한 기슭에 있는 원효사 동부도는 현존하는 부도 중 조각기법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사면에 동물모양의 해학적 모습이 특이하다.
절 바로 앞에 높고 긴 계단이 있고 양옆으로 하늘을 뒤덮은 우거진 대숲 때문에 절을 향해 나 있는 통로가 마치 하늘을 오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1980년 5월 대웅전 신축 작업 중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팀에 의해 발굴된 청동, 청동불 입상, 동경(구리거울), 각종 소조불 등 백여 점의 유물은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대의 것들로서 원효사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원효사(광주)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tour.gwangju.go.kr
https://www.wonhyosa.org
전화번호 062-266-0326
운영 시간 일출~일몰
주차시설 가능
쉬는 날 연중무휴
충장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장사 소개
원효사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 배재에 이르면 왼편에 잘 가꾸어진 묘소와 함께 충장사의 우람한 건물이 바라다 보입니다.
이 충장사는 무등산이 낳은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우로 1975년에 세워졌다.
경내에는 김덕령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되어 있는 사우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김덕령 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당 뒤쪽 언덕에는 김덕령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가족묘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충장사로 향하는 길은 광주 사람들에게 드라이브 코스로 사랑받는 길입니다.
봄이면 노란 개나리가 길섶을 수놓고, 여름이면 신록이 우거져 터널을 이루며, 가을이면 빨간 단풍이 숲을 물들이고, 겨울이면 나무마다 눈꽃이 피어 설원에 온 듯 장관을 이룬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광주 사람들이 즐겨 찾는 길입니다.
* 김덕령 장군에 대하여
김덕령 장군은 광주시 충효동에서 1567년 광산 김씨 가문 붕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글을 배워 장성하면서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송강 정철과 함께 수학하였습니다.
1592년(선조 25년)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의병활동에 참가하였습니다.
이 때 형 덕홍은 의병장 조헌이 이끈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였으며, 장군은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 현감 이귀등의 천거로 선조로부터 형조 좌랑의 벼슬을 받았습니다.
1593년 담양지방에서 의병 5,000여 명을 이끌고 출정하니 나라에서는 장군을 선전관으로 임명하고 익호장군의 호를 내렸다.
1594년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진해, 고성에서 왜군을 방어했으며, 장문포 싸움에서는 충무공 이순신과 수륙연합전으로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1595년에는 고성에 상륙하는 왜군을 기습 격퇴하여 큰공을 세우니, 선조로부터 충용장이란 군호를 받았습니다.
1596년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던 중 모함으로 투옥돼 갖은 고문 끝에 그 해 9월 15일 29세의 나이로 결국 김덕령은 감옥에서 고문을 받다가 장독으로 옥사하였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수많은 공을 세우고도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을 더욱 떠받들어 그의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 ·연대 미상의 전기소설 《김덕령전》이 있습니다.
1661년(헌종2년)에야 공의 억울함이 조정에 알려져 관직이 복직되고, 1668년 병조판서에 가증, 영조 때 의열사에 제향되었으며 1788년 정조는 장군께 충장공의 시호를 내렸으며, 장군이 태어난 마을 석저촌을 충효의 고을이라 하여 충효리로 바꾸도록 하였습니다.
충장사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tour.gwangju.go.kr
운영 시간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
주차시설 주차 가능
쉬는 날 연중무휴
충민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민사 소개
광주 충민사는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에서 청나라군과 싸우다 순절한 전상의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전상의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장군으로 이후 난이 끝난 후, 곧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이어서 안주로부터 출생지인 광주로 시신을 옮기어 동년 7월 26일 이곳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평두산에 예장하였습니다.
1977년 광주 지역민들의 뜻을 모아 장군의 묘소를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하고 1985년 충민사를 준공하였습니다.
이 곳 충민사에는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을 비롯, 수의문, 정려각, 장군의 유물(갑옷, 투구, 활, 칼, 교지, 완문, 완약)을 전시한 유물관 등이 있습니다.
또한 광주고등학교에서 사구동에 이르는 거리를 구성로로 명명하여 그 이름을 기리고 있습니다.
* 전상의 장군
전상의 장군은 1575년 광주 구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용력과 무술이 뛰어난 장군은 선조 36년(1603) 29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의 초임 발령 이후 내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광해군 9년(1617)에는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때 끌려간 동포 300여명을 귀국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인조 5년인 1627년 1월 청나라 3만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황주에 이르자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하고 곧이어 정묘강화를 체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장군은 안주성 싸움에서 5일동안 분전하다가 53세의 일기로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민사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tour.gwangju.go.kr
운영 시간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
주차시설 있음(소형차 20대)
쉬는 날 연중무휴
국립 5·18 민주묘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국립 5·18 민주묘지 소개
1980년에 일어난 광주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이 묻힌 공동묘지로 5·18 묘역이라고도 합니다.
문민정부 출범과 더불어 5·18 민주항쟁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5·18 희생자 묘역을 민주 성지로 가꾸려는 움직임이 뜻있는 국민들로부터 일어났다.
광주광역시는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아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산 34번지 165k㎡의 부지 위에 5·18 묘지를 조성하였습니다.
묘역 안에는 5·18 영령의 묘 764기(2017년 기준)가 있으며, 건축물 7동(민주의 문, 유영봉안소, 역사의 문, 숭모루, 추념문, 관리동, 휴게실)과 역사공간, 민주광장, 참배광장, 전시공간, 상징조형물, 광주민주화운동추모탑, 7개 역사마당(의병, 동학, 3·1 운동, 광주학생운동, 4·19 혁명, 광주민주화운동, 통일마당), 헌수기념비, 준공기념탑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5·18 민주 항쟁은 1980년 5월, 12.12사태와 당시의 군부에 의해 벌어진 정권 장악 음모에 대항해 일어난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자행된 대표적인 반민주 학살 사건이며, 이에 저항한 시민 민주항쟁입니다.
이 묘지는 여기서 희생당한 광주 시민들의 넋을 기리며, 이 땅에 다시는 불의와 독재가 발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살아 있는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민주 성지를 내손으로 가꾸기 위해 시작한 민주나무 헌수운동은 5·18의 숭고한 정신을 국내, 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5·18 묘지 중앙에 위치한 사각기둥인 탑신은 높이 40m로 우리나라 전통석조물인 당간지주를 현대감각에 맞게 형상화했습니다.
탑신 가운데 감싸 쥔 손 모양으로 중앙에 설치된 타원형 형상은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상징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광에 반사된 빛은 희망의 씨앗입니다.
※ 경건한 참배분위기를 위하여 슬리퍼, 민소매 등의 복장은 자제 요망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국립 5·18 민주묘지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www.mpva.go.kr/518/index.do
운영 시간 09:00~18:00
주차시설 가능 (대형, 소형 총 380여 대)
환벽당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환벽당 소개
환벽당은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 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에 힘쓰던 곳입니다.
환벽(環璧)이란 뜻 그대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룬다라는 의미입니다.
환벽당은 시가문학과 관련된 국문학사적인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며, 별서 원림으로서 가치가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당호(堂號)는 영천자 신잠이 지었으며, 벽간당이라고도 불렀음이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입니다.
가운데 2칸을 방으로 하여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깐 변형된 형식입니다.
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후대에 증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제액이 걸려있고, 석천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습니다.
환벽당에 관한 시는 정철이 지은 2수가 있는데, 송강속집과 광주목지에 실려 있습니다.
환벽당에는 정철에 얽힌 일화가 전합니다.
어느 날 김윤제가 이곳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이상히 여겨 급히 그곳에 내려가보니 미역을 감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되어 외손녀를 이 소년에게 시집보냈는데, 이 소년이 뒤에 정치가로서 또한 문호로서 이름을 날린 정철이었습니다 합니다.
환벽당 아래는 김윤제와 정철이 처음 만난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조대와 용소가 있습니다.
창계천 동북쪽으로 250m쯤 떨어진 곳에는 식영정이 있으며, 환벽당 바로 곁에는 취가정이 있습니다.
인근에는 독수정과 소쇄원이 자리 잡고 있어 바로 이 일대가 조선시대 원림 문화의 중심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사촌 김윤제
김윤제(1501~1572)는 본관이 광산으로, 충효리에서 태어났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교리 겸 춘추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뒤 홍문관교리, 나주 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습니다.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는데, 송강 정철과 서하당 김서원 등이 대표적인 제자입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학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환벽당 기본 정보
광주 충효동 요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광주 충효동 요지 소개
무등산 북쪽 충효동에 자리잡은 가마터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상감청자·분청사기·백자를 굽던 곳입니다.
가마의 구조는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시설·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굴뚝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둥근 무덤 형태가 연결된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 출토유물의 연도를 통해 1430년을 전후해 만들어지기 시작된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그 후 약 70∼80년간 자기제작이 지속되다가 16세기 초에 중단되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초기에는 분청사기만 만들다가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같이 제작했으나, 분청사기의 무늬가 조잡해지면서 생산량이 줄어들었습니다.
반면 백자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질이 좋아지고 생산량도 늘어 분청사기가마에서 백자가마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백자는 크기가 작은 것이 주를 이루는데 비해 분청사기는 크고 작은 것 모두 있고, 종류도 접시·종지·잔·병·항아리·벼루·제기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분청사기에 주로 사용된 무늬는 국화·나비·물고기·게·구름무늬 등이며 여러 무늬를 조합하여 그리기도 했습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운영되었던 곳으로, 청자부터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출처: 광주광역시 북구문화관광홈페이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광주 충효동 요지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culture.bukgu.gwangju.kr
http://www.cha.go.kr
운영 시간 09:00~18:00(전화문의)
주차시설 주차 가능
쉬는 날 매주 월요일(전화문의)
충효동 정려비각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효동 정려비각 소개
충장공 김덕령(1568~1596) 장군과 그의 부인 흥양 이 씨, 그 형 덕홍과 동생 덕진 일가족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충효리 마을 앞에 세운 비각입니다.
이것이 여느 문과 다른 것은 이 비각 앞의 현판에 새겨 있는 내용에서 “... 1788년 정조가 윤음으로서, 표리비를 세우라” 이르고, 충효 지리[忠孝之里]라는 마을 이름을 지어 하사한 점입니다.
비는 1789년(정조 13년)에 세운 것으로 전면에는 비명이 3행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비의 크기는 총 높이 220Cm, 기단 높이 110Cm, 비신 높이 171Cm, 비신 너비 68cm이며 비갓이 얹혀 있습니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비각의 건립 연대는 1792년이며, 그 뒤 수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비각 전면에는 전주 부윤 한용구가 쓴 정조어제윤음[正祖御製倫音]이란 현판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충효동 정려비각 기본 정보
광주 충효동 왕버들 군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광주 충효동 왕버들 군 소개
광주호 동쪽 호안(湖岸)과 충효동 마을 사이의 도로변에 위치한 왕버들나무는 버들과의 딸린 갈잎 큰키나무입니다.
암수 나무가 딴 그루를 이루며, 4월에 꽃이 피고 열매는 5월에 익습니다.
우리나라 경기도 이남 지역과 일부 중부 이남 지역, 중국 중부 지역에 분포하며 풍치림(風致林)과 정자목(亭子木)으로 널리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물가나 들에서 자라며, 목재는 가구와 땔감 등으로 쓰입니다.
충효동의 왕버들 3그루는 모두 광주시 나무로 지정되어 있는데 원래는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마을의 상징 조경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매화와 왕버들 1그루는 말라죽었으며, 또 1그루의 왕버들과 소나무는 마을 앞 도로를 확·포장하면서 잘라 버려 지금은 왕버들 3그루만 남아 있습니다.
마을에서는 다시 왕버들 2그루를 식목하였으며, 소나무와 매화도 계속 식목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효동의 역사는 분명치 않으나 예부터 성이 있어 성안 또는 석저촌(石低村)이라 불려왔다.
이 일대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양산보(梁山甫)의 소쇄원(瀟灑苑)을 비롯하여 김윤제(金允悌)의 환벽당(環璧堂), 김성원(金成遠)의 식영정(息影亭)과 누하당(樓霞堂) 등의 원림(苑林) 정각(亭閣)이 많이 있어, 주변 조경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곳입니다.
* 나무의 크기
1) 높이 9m, 둘레 6.25m, 수관(樹冠)너비 11.5 ×18.9m
2) 높이 10m, 둘레 5,95m, 수관너비 14.0 ×14.0m
3) 높이 12m, 둘레 6.30m, 수관너비 16.6 ×27.0m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광주 충효동 왕버들 군 기본 정보
지금까지 광주 북 가볼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댓글 쓰기